이토록 타인이 홀가분해지는 순간
나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친구들에게 항상 말해왔다. 너는 나의 진짜 친구라고.
그 말을 친구들에게 함으로써 그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고,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내게는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말이었을까, 나를 그만큼 특별하게 대해 달라는 압박이었을까?
인간이기에
인간은 저마다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를 얻는다. 가족에게서는 편안함을, 친구에게서는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동료에게서는 인정과 성장의 감각을, 그리고 연인에게서는 사랑과 안정을 얻는다. 이것들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욕구이며, 각 관계가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
문제는 인간관계를 줄인다고 해서 이런 욕구까지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이 줄어도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여전히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남아 있는 몇 사람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친구 열 명이 나누어 하던 역할을 친구 한 명에게 맡기고, 가족과 친구와 동료가 나누어 채워주던 것을 연인 한 사람에게 요구한다. 관계는 단순해졌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책임은 오히려 무거워진다.
나는 너밖에 없어라는 말은 낭만적인 고백처럼 들린다. 하지만 때로는 그러니 너는 내 모든 것을 채워줘야 해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돌이켜 보면, 나도 무의식적으로 주변 인연들에게 압박을 주었고, 또 그만큼의 대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일부러 인간관계를 좁히며 그들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새로운 친구와 나만큼 잘 지내는 것을 질투했고,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들의 기분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의존적으로 변해갔다.
그것이 심해지자, 심지어 내가 열심히 성장하고 무언가를 이루는 일에도 미안함을 느꼈다.
이것이 기이하게 들릴 수는 있다. 설명하자면, 나는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이더라도 나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썩 유쾌하지 않다.
그렇기에 남들도 나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누군가를 뛰어넘을 때 그들이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군가를 ’뛰어넘는다’는 표현 자체도 내가 무언가에 매몰되었다는 증거 같다. 나의 성장이 상대에게 무력감이나 열등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가 실제로 느낀 감정이 아니라, 내 감정을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결코 건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바랐던 것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할 때 더 기뻐하고,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많이 찾아주는 것이었다.
의존은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옮기는 것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투자한 시간과 감정이 많기에 관계에서 무언가를 쉽사리 바꾸기 어렵다고 한다. 그들을 마음에서 쉽게 덜어낼 수도, 끊어낼 수도 없다. 그것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그리고 내게 꼭 필요한 사랑, 인정, 성장, 안정, 소속감을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맡기는 것은 내게도, 그들에게도 독이다.
책은 관계에서의 의존을 무조건 끊어내는 대신 관계의 울타리를 넓히라고 말한다. 관계의 울타리 바깥에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내게 필요한 욕구를 채워주는 작은 관계들을 늘리다 보면 자연히 의존은 옅어지고 중심이 이동한다고 말한다.
돕고 싶다면 기둥이 되어라
과거 내가 인상 깊게 봤던 산소 마스크 비유가 책에 또 등장했다.
기내에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부모와 아이 중 누구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워야 하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아이에게 먼저 씌워야 할 것 같지만, 비행기에서는 부모가 먼저 쓰는 것이 지침이라고 한다.
아이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워줄 수 있는 것은 부모뿐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산소 마스크를 썼다면, 아이도 산소 마스크를 곧 쓰게 될 것이지만, 반대는 그렇지 않다.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지키는 방법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기대하거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지키고 스스로 그들의 기둥이 되어주는 것이다.
